본문 바로가기
광물의 역사

아스팔드의 역사

by 참이슬맞으며 2023. 2. 1.
반응형

현대사회에서 아스팔트란 도로와 고속도로, 혹은 인도 및 보도를 포장하는 콘크리트의 재료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의 아스팔트는 중세 초에 가장 강력했던 무기, '그리스의 불'을 만들던 중요한 원료였습니다.

1)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어막

많은 사람의 인식 속에서 서양의 고대사는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략과 그 이름도 거창한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460-90)의 퇴위로 끝을 맺습니다. 이 황제의 이름은 로마의 건립자와 초대 황제의 이름을 합쳐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 그가 로마를 지배한 기간은 고작 1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동로마 제국 혹은 비잔틴 제국으로 불렸던 나라는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손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이 함락되기까지 약 1000년이라는 시간을 더 보냈습니다. 이후 서기 800년에 신성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동방의 황제들이 옛 로마 제국의 땅을 지배한다는 소문이 수 세기 동안 떠돌았습니다.

비잔틴시대 초기에 제국 주변에는 수많은 적이 들끓었습니다. 그중에는 북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야만족들, 그리고 최대의 적이자 경쟁국으로써 제1천년기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우뚝 선 페르시아의 사산왕조(205-651)가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간의 전쟁은 수백 년간 계속되었고 양국은 수 차례 승리와 패배를 주고받았으나 627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574-641)가 사산왕조의 군대를 완파한 것을 계기로 페르시아는 모든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영광이 재현되리라 믿은 황제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지만 기쁨도 잠시, 동 로마 제국의 대승과 때를 맞추어 이후 세계 역사를 뒤바꿀 새로운 세력, 바로 이슬람교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였습니다.

헤라클리우스의 생전에 선지자 무함마드(570-632)는 서로 전쟁을 일삼던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그전까지 세상에 전례가 없었던 공포의 군대를 만들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에는 지하드, '성전'을 부르짖는 아라비아 전사들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가 된 이슬람 군대는 몇 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 아프가니스탄,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속하는 일부 지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남북으로는 아라비아부터 터키 남부까지, 동서로는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같은 부유한 지방을 잃으며 제국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2) 불타는 물

아스팔트는 현재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으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라 브레아 타르 늪을 들 수 있습니다. 아스팔트는 석유를 비롯한 여타 탄화수소 물질과 마찬가지로 고온고압에서 압축된 유기물로 구성됩니다. 아스팔트는 고대부터 접착제나 건축 마감재로 사용되었으며 배나 각종 용기, 홍수 위협을 받는 건물의 방수제로도 쓰였습니다.

아스팔트는 인화성 반액체 물질로, 정제된 휘발유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탄화수소류와 마찬가지로 불꽃이 닿으면 발화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무기로 이름을 날렸던 '그리스의 불'을 제조했습니다.

옛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발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윤리 사상과 고전 연극, 천문학 등을 주제로 많은 기록을 남기는 한편, 기중기로 적의 전함을 들어 올려 암반 위에 떨어뜨리거나 커다란 돋보기로 햇빛을 집중시켜 전함에 불을 지르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당시 한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아라비아 군대가 비잔틴을 공격하던 77세기말에 칼리니코스라는 한 과학자가 신무기 제조법을 가지고 헬리오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했다고 했습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과연 칼리니코스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 혹은 그가 진짜 그리스의 불을 발명했는지 의문을 표합니다. 고대 로마인과 그리스인은 전쟁에서 항상 불을 썼으므로 실제로는 칼리니코스가 기존 방식을 개량했거나 그리스의 불을 사출하기 위한 분사기를 고안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리스의 불은 주로 해전에서 큰 힘을 발휘했는데, 꺼지지 않는 불길이 바다 위에서 목재로 만들어진 전함을 휩쓸 때 더욱 강력한 효과를 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양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반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육지 쪽에서는 이중으로 된 성벽과 해자가 도시를 방어했는데, 매우 견고하게 지어 진이 방어벽은 15세기 들어 대포의 화력 앞에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를 굳건하게 지켜냈습니다. 아라비아인은 바닷길을 끊어 적의 식량 보급을 막거나 방어가 약한 방파제를 공략해야 이 도시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674, 아라비아인들은 육로를 봉쇄하고 대형 선단을 조직해 해로를 틀어막은 후 콘스탄티노플에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해군은 그리스의 불로 무장한 특수 전함을 동원했고, 677년에 마르마라해에 운집한 아라비아 함대를 격퇴했으며 아라비아군은 717-18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 침공을 시도했으나, 적군의 상륙과 방파제 공격을 저지한 그리스의 불 덕분에 그 결과는 이전과 같았습니다.

당대의 원자폭탄과 같았던 그리스의 불에 대한 정보는 극비 사항으로 다뤄졌으며, 현재까지도 정확한 조성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1204,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해 조직된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파괴한 후, 그 자리에 라틴 제국을 세웠고 이러한 정권 변화의 혼란 속에서 그리스의 불을 만드는 비법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무기의 효과를 적은 기록과 당시에 활용 가능했던 재료를 이용해 가장 그럴 법한 제조법을 재현했습니다. 그리스의 불은 분사관을 통해 사출되었으므로 그 상태는 액체여야 합니다. 또한 물 위에 뜬 채로 곧장 발화하여 계속 불에 탄다는 특징이 있으며, 식초나 모래, 혹은 인간의 오줌으로만 그 불을 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생석회· 유황 · 나프타 · 아스팔트의 혼합물이 실제 그리스의 불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별 볼 일 없는 모습을 띠고 도로 건설용 자재로나 쓰이고 있지만, 500년 동안 이 물질은 비잔틴 제국과 멸망 직전까지 갔던 그리스도교 세계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반응형

'광물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리석의 역사  (0) 2023.02.02
석고의 역사  (0) 2023.02.02
수은의 역사  (0) 2023.01.31
철의 역사  (0) 2023.01.30
황토의 역사  (0) 2023.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