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아마 '비소'라는 단어에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비열한 살인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상속에 방해가 되는 부모나 자녀, 혹은 배우자를 독살하는데 비소가 자주 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소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광물이 의학, 예술, 화장, 산업용으로 사용된 것은 무려 선사시대부터였습니다.
비소는 금속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 규소(Si), 안티몬(Sb)과 함께 '준금속'으로 분류되지만, 화학자들은 비소를 제대로 된 금속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소는 독극물의 하나로써 무시무시한 명성을 자랑하지만 자연 비소나 여러 가지 비소 화합물은 흙, 동식물, 인체 신진대사 기관처럼 우리 가까이에서 의외로 쉽게 발견됩니다. 고대 중국 · 인도 ·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은 비소를 치료제로 사용했으며, 당대의 독약 제조법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들 역시 비소 화합물을 암살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부 무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 서양에서 흔히 지베르라고 불리는 아라비아의 연금술사는 훗날 '상속의 가루'로 불린 무미 · 무취의 고독성 백색 가루, 즉 삼산화이비소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가루는 재산 상속에 방해가 되는 친인척을 제거하려는 이들이 주로 애용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비소는 사람이 맛이나 냄새로 그 존재를 전혀 알아챌 수 없으며, 중독 증상 또한 식중독이나 장 질환 혹은 콜레라처럼 20세기 이전에 흔히 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질병들과 유사했습니다.
비소는 가스 형태로 흡입하거나 피부에 국소적으로 투여할 수 있고, 음식과 음료수에 섞을 수도 있는데 이중 음독으로 살해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소의 치사량은 125밀리그램과 250밀리그램 사이로, 사람의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소를 다량 섭취한 사람은 두통을 겪게 되며 독성을 체외로 배출하려는 신체 반응으로 구토와 설사 증상이 나타납니다. 비소가 주요 장기에 침투하면 발한, 탈수 현상, 언어 장애, 복통, 요로와 항문의 화끈거림, 경련, 정신 착란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피해자는 그로부터 24-48시간 사이에 혼수상태에 빠져 심부전과 호흡부전으로 사망합니다. 비(非) 치사량을 섭취한 경우에는 얼마 후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는데, 다른 독성 물질과는 달리 비소는 체내에 축적되지 않고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독극물로 살인을 준비한 이들이 대개 피해자로부터 전혀 의심을 사지 않을 배우자 혹은 가까운 친인척이라는 점, 그리고 중독 증상이 식중독과 유사하다는 사실 때문에 범행자는 발각될 위험 없이 치사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마음껏 실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 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소를 먹고 살해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숫자는 수만 명에 달할 것입니다. 더구나 19세기까지는 비소를 감지하는 확실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살인 사건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종료되거나 피해자가 비소 중독과 증상이 유사한 다른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오진이 많았습니다.
독살의 연대기 속에서 보르지 가문은 '세계 최초의 범죄자 집안'이라는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이 가문에는 추기경 시절 수많은 사생아를 낳은 타락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도 있습니다. 보르자 가는 '라 칸타렐라'라는 독약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무시무시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약에는 삼산화이비소가 섞였으리라 추측됩니다. 특히 알렉산데르 6세의 자식인 체사레(1476-1507)와 루크레치아(1480-1519)는 라칸타렐라를 즐겨 쓴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미모가 빼어났던 가진 루크레치아는 반지의 보석 아래 독약을 숨 겨두었다가 포도주에 타서 상대방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약 두 세기가 지난 후, 이탈리아의 쥴리아 토파니는 비소와 벨라도나를 섞어 아쿠아 토파나라는 물약을 만들고 이를 거추장스러운 남편을 처리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에게 판매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독약을 판 죄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며,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산' 남편을 살해하고자 했던 여인 600명에게 약을 팔았음을 자백한 후 처형되었습니다.
산업혁명기에 비소화합물은 안료와 착색제로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던 물감 중 하나는 이른바 '셀레의 녹색'으로, 스웨덴의 화학자 카를 셸레(1742-86)가 1775년에 처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짙은 에메랄드 녹색은 벽지, 벽걸이 장식품, 가구용 직물과 의복의 착색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물질에 독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사탕과 음료에 색을 내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굵직굵직한 비소 중독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했습니다. 1858년 잉글랜드의 브래드포 드에서는 사탕 공장의 솥이 삼산화이비소로 오염되는 바람에 2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1900년에 맨체스터에서는 비소가 포함된 맥주를 마시고 6000명이 집단 중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932년에는 비소 농약의 잔존물이 섞인 포도주 때문에 프랑스 전함의 선원 모두가 중독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인이나 산업 재해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비소 중독을 자초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적은 양의 삼산화이비소는 인체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는데, 실제로 중국과 인도의 전통 의술에서는 극미량의 비소가 함유된 치료제를 조제하기도 합니다.
18세기 후반에 자칭 '파울러 박사'라는 한 엉터리 약장수가 유독물인 아비 산칼륨(KASO2)을 함유한 신비의 명약 '파울러 용액'을 판매했습니다. 한때 만병통치약과 강장제로 팔린 이 용액은 현재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 약의 피해자로 지목받는 사람들 중에는 찰스 다윈(1809-82)이 가장 유명한데, 그가 죽을 때까지 앓았던 의문의 질환이 파울러 용액에 중독된 탓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