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고의 광물로 손꼽히는 금은 부유함의 상징으로, 이는 금괴 · 주화 · 장신구의 형태로 구현됩니다. 금을 향한 사랑 하나로 인간은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탐험하며 수백만명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사실 금은 철이나 구리, 혹은 석탄이나 점토에 비해 활용도가 매우 떨어지는 물질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금의 변하지 않는 광채를 우리의 더럽혀진 마음을 밝힐 꿈과 희망처럼 여기며. 이 금속에 큰 가치를 부여해 왔습니다.
1) 젊은이여, 서쪽으로
"일천사백하고도 구십이 년/ 콜럼버스는 푸른 바다로 배를 띄웠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영시가 있습니다. 앞부분은 유명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두 구절 "콜럼버스는 금을 찾으러 항해를 나섰다네/ 고국으로 금을 싣고 돌아오라는 명령에 따라서"를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을 지원해 준 스페인 통치자들을 위해 향신료, 금은보화, 각종 상품의 동아시아 교역로를 개척한다는 꿈을 안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1492년에서 1503년 사이에 있었던 네 차례의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를 발견했으며, 그곳들이 각각 동인도와 일본, 중국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대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업적도 인정받지 못한 채 치욕을 겪으며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업을 계기로 세계의 축은 서방을 향하게 되었으며, 세상을 바꾼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서유럽 사람들이 상상한 동양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전설적인 도시에서 시작하여 캐세이(중국)와 지팡구(일본)라는 신비의 왕국까지 이어졌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금이 구리나 철처럼 흔하다는 소문을 믿었습니다. 비잔틴 제국(395-1453)은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주조하여 주화폐로 사용했으나, 그 외의 유럽은 주로 은화를 사용했습니다. 금은 희귀한 금속이었고, 그래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금은빛이 바래지도 산화해 녹슬지도 않는 몇 안 되는 금속이었으며, 구리를 제외하면 칙칙한 잿빛을 띠지 않는 유일한 금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에 이르러 전자 기술과 치의학에서 유용하게 쓰이기 전까지 금은 유리 망치만큼이나 쓸모없는 물질이었습니다. 연장이나 무기, 기계 등을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물렀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전장에서 금제 갑옷에 목숨을 맡기려 시도해 봤다면, 그는 이 금속이 엄청나게 무거울 뿐 아니라 강철 검과 화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달아서 사람들은 금으로 화폐를 주조하거나 장신구를 만들 때 은이나 다른 금속을 섞어 강도를 높였습니다.
사실 동양의 엄청난 부에 대한 전설은 콜럼버스의 시대가 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서는, 이아손과 그를 돕는 영웅들이 황금 양털을 찾고자 흑해 동부 해안에 자리 잡은 콜키스왕국으로 배를 띄우고 수많은 난관을 거치며 황금 양털을 손에 넣은 이아손은 승리자가 되어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그리스로 돌아옵니다. 이 이야기의 현대적 해석은 이러합니다. 당시 흑해 지방의 거주민들이 강에서 사금을 채취하는데 양모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화는 실제로 그 시절에 보물을 쫓던 해적 이야기인 셈이고 그 후로 이어진 1000년의 세월 동안에도, 실존하는 혹은 소문 속의 금을 찾기 위한 탐험은 흔한 이야깃거리이면서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2) 황금을 위하여
금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여러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금을 쓸모없는 금속으로만 여겼던 평원 인디언과 그 밖의 수렵채집민 무리를 제외하면 정착 생활을 했던 소위 문명사회 사람들은 항상 금에서 기이하고도 불가해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금은 20세기까지 세계경제체계의 토대였으며, 대다수 정부가 주화 대신 각 국가의 은행권을 선택하면서 국제 통화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하급수적인 경제 성장에 비해 금의 공급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문제가 나타났고 금이 통화량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엉망진창이 된 경제를 재건하고자 각국 정부에서 금 보유량보다 많은 돈을 찍어 내는 바람에 이 체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때는 은행권 한 장을 같은 가격의 금으로 환산할 수 있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이 말이 모두 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나 영국의 중앙은행에 가서 달러 지폐나 파운드 동전을 금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해도 퉁명스러운 대답만이 돌아올 뿐입니다.
그러나 15세기에는 금의 보유량이 곧 개인과 국가의 부유함을 나타내는 지표였고 당시의 스페인 사람들은 무역과 산업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벌어들였는데, 이것이 기존에 보유한 금의 가치와 충돌하면서 사회적인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스페인은 신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니, 포르투갈의 소유가 된 브라질과 영국,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캐나다와 미국 동부 연안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었지만 이들 지역에서는 금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스페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와 아메리카대륙을 거친 여정에서 금을 싣고 돌아왔지만, 스페인 왕가에게 그 양은 충분하지 않았으며 결국 탐험가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그들의 탐욕을 모두 채워주고도 남을 굉장한 황금 왕국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바로 아스텍과 잉카제국이었습니다.
3) 십자가와 칼
가까스로 이슬람교의 지배에서 벗어난 스페인은 철저한 그리스도교의 나라이자 종교적으로 편협한 사회였습니다. 이단자와 이슬람교도, 유대교도에게는 종교 재판이 뒤따랐습니다.. 그 실제 모습은 영화에서 그려진 것만큼 잔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으나, 당대의 탄압 활동은 분명 게슈타포나 KGB처럼 악랄하고 강력한 정치적 억압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최초로 신대륙 문화권과 접촉한 나라가 신교도의 나라 잉글랜드나 네덜란드가 아닌 스페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연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아스텍 제국은 지금의 멕시코에 해당하는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그 수도였습니다. 15세기는 제국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아스텍인은 멕시코 계곡 근방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제국들처럼 정복지의 통치자와 지배층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곳 주민으로부터 공물을 받아 원거리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따라서 아스텍의 지배에 반감을 드러내는 세력이 끊임없이 등장했고, 제국 내에도 다른 부족의 고립 영토가 군데군데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때를 맞춰 나타난 스페인의 에르난도 코르테스(1485-1597)가 아스텍의 모든 것을 이용하고 착취했습니다. 코르테스의 표면적인 목적은 이교를 믿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진실한 믿음을 전파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가 정말로 찾던 목표물은 바로 황금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막대한 양의 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4) 검은 전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정복자의 손에 가혹한 파멸을 맞이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당시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후세 사람들은 스페인의 잔학상을 '검은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설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당도하면서 계속 이어졌고, 이로 인해 원주민의 고유문화가 파괴되며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질병으로 신대륙 인구의 95퍼센트가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스페인 정복자들이 당대의 여타 유럽 강대국들보다 특별히 더 흉악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영국이 인도를 정복했을 때 발생한 피해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 도 정복은 18세기에 일어났고, 시기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근본주의의 불길이 크게 사라진 때였으며 무엇보다도 인도와 영국의 기술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1519년에는 멕시코에, 그리고 10년 후에는 페루에 발을 들인 스페인 사람들은 금으로 가득 찬 도시 대신에 원주민 지배층이 수 세기 동안 수집하여 사원과 궁전, 묘지 등을 꾸미는 데 사용한 금 장신구와 유물을 발견했습니다. 유럽과 다르게 그곳에서는 금이 통화나 교역의 매개체로 사용된 적이 없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당도하기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은 경제적인 면에서 15세기의 유럽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스텍 제국은 식량 · 원자재 · 사치품 등을 수도로 납부하는 공물수납 체계를 운용했고 일상적인 경제활동은 물물교환에 의해 이뤄졌다. 잉카 제 국은 원시적인 공산주의 국가라고 전해지는데, 정확히는 공동체주의에 더 가까웠으며 각 지역 사회는 중앙집권화한 국가의 보호 아래 재산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잉카족은 금을 그들의 주신인 태양신 인티와 관련지어 생각했고, 그래서 수도 쿠스코에 있는 인티의 신전 코리칸치는 안팎이 황금판으로 장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금은 단순한 상징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보기에 금을 향한 스페인 사람들의 집착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기껏 귀중한 유물과 장신구를 모아서 한다는 행동이 그것을 모두 녹여 흉하게 생긴 덩어리를 만들고 스페인에 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제국이 치른 대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와 페루의 금을 착취하며 알게 된 사실은 신대륙의 금 역시 구대륙만큼이나 그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발견한 보물을 고국으로 실 고 돌아갔고, 16세기의 스페인은 지구상에서 금괴가 가장 풍부한 나라가 되었으나 이후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스페인은 아스텍과 잉카의 금을 얻은 진짜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의 쉬운 돈벌이 기회를 놓친 영국 · 프랑스 · 네덜란드는 아쉬운 대로 북아메리카를 개척했습니다. 그들은 한정된 자원을 착취하는 대신 천연자원 개발과 무역, 생산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유럽의 최선진국 중 하나였던 스페인은 점차 말썽과 사치에 물든 제국으로 변화하며 경제적으로 뒤처졌습니다. 한때 무적함대로 잉글랜드 왕국을 위협했던 스페인이었지만,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 내리 패배하고 북유럽 국가들과도 갈등을 겪으면서 그들은 동맹국 프랑스에 의존하는 처지가 되었으나 국민의 힘으로 왕을 끌어내리고 황제(나폴레옹 1세 1769-1821)를 그 자리에 앉힌 프랑스는 결국 스페인이 세운 아메리카 제국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으로 제국은 붕괴하였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차례차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그들의 제국을 탐욕스러운 저장고로 삼고 금을, 또 그것이 부족할 때는 은을 착취할 때 잉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는 무역망을 확충하고 원자재를 고국으로 보내 가공한 후 다양한 상품을 전 세계로 재수출했습니다. 스페인의 경제 상황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을 때까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의 독재체제가 끝날 때까지도 이 나라에는 사회 · 정치 · 경제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20세기의 영국이나 21세기의 미국도 패권국이 겪어야 하는 각종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지만, 옛 스페인 제국이 남긴 우울한 유산에 비하면 이는 한결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경제체계에서 금이 공식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사람들은 경제 위기 때마다 금을 최우선적인 투자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고 지분 가치가 대폭 떨어질 때 투자자들은 금을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고 여깁니다. 2011년 여름에 금값은 그램당 64달러, 은은 그램당 1.40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고 금의 생산량이 점차 줄어드는 탓에 앞으로도 금값이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일 가능성은 꽤 큽니다. 따라서 지구의 핵에 존재하는 금 수백만 톤을 채취할 방법이 나타나기 전까지, 황금을 쫓는 인간의 꿈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